광개토왕을 주인공으로 한 "태왕사신기"가 방송되고 있습니다. 사극이라기 보다는
판타지 무협물로 보는 게 옳겠지만, 그래도 엄연히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인
만큼 역사적 배경 같은 것들을 인지하고 보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제19대 왕으로 고국양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담덕(談德)입니다.
18세에 왕위에 올라 39세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재위 기간은 22년(391~412)입니다.
타계한 후 3년째인 갑인년(414)에 비로소 왕릉에 모셔지게 되었고 아울러 유명한
광개토왕릉비도 세워지게 되었는데, 이 3년간 시신은 빈전에 모셔져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덧붙이자면 광개토왕이 왕릉에 모셔진 날이 9월 29일입니다. 물론 음력
이지만, 다소 억지를 부려 의미를 부여하자면 숫자상으로는 바로 오늘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어려서부터 체격이 웅위하고 뜻이 고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치고 체격 안 좋고 성격 안 좋다고 하는 왕은
별로 없으니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무릇 역사 책에 남겨진 왕에 대한 묘사라는
것은 정형돈 같은 이는 체격이 웅위한 영웅으로, 유재석 같은 이는 뜻이 고상한 성군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왕이 전쟁을 좋아했고 또 이 방면에 재능도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에 그 기록이 남아 있는데, 아쉽게도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광개토왕 항목은 A4 1장 분량, "광개토왕릉비"에 실린 광개토왕의 훈적 내용은
A4 2장 분량 정도에 그칩니다. 아주 소략하지요. 그 때문에 학계에서는 아직도 광개토왕의
군사활동 대상이나 규모, 성과에 대해 갑론을박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당금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광개토왕의 이미지가
상당 부분 부풀려진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광개토왕이 정복 군주라는 것은 틀림이
없고, '광개토(廣開土)'라는 시호가 어울렸던 인물이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광개토왕이
광활한 중국을 정복했다든지, 대륙을 호령했다든지 하는 이미지는 정말이지 부적절한
것입니다.
일단 광개토왕 재위 시절의 중국은 오호 16국 시대로, 자기들끼리 견제하고 다투느라
굳이 동쪽 변방에 위치한 고구려를 신경쓸 이유가 없었습니다. 광개토왕 당대에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중국 쪽 국가는 선비족의 나라인 후연(後燕)과 후연이 망하고
생긴 북연(北燕)입니다. 후연의 경우는 한때 화북 지역에서 꽤 위세를 보였으나
북위의 공격에 호되게 당하여 수도를 함락당하고 광개토왕대에 이미 요서 지역으로 쫒겨
와 화룡성을 수도로 삼는 등 퇴락한 상태였고, 그 뒤를 이은 북연의 경우 역시 그다지
강국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이중 북연의 경우는 고구려와 비교적
외교 관계도 좋아 전쟁을 벌인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광개토왕대에 고구려와 중국의 싸움이라면 곧 후연과의 싸움인데, 기이하게도
"광개토왕릉비"에는 이 후연과의 싸움이 일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능비를 보면 백제나
백제와 연계된 것으로 보이는 왜와의 싸움이 주이고, 별 볼일 없어 보이는(나라도 아니기
때문에) 거란 부족, 숙신 부족, 명맥만 간신히 잇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동부여를 소탕한
것이 훈적의 전부입니다.
우리도 이력서를 쓸 때 흔히 하는 짓이지만, 없는 일도 있다고 하거나 별 것 아닌 것도
대단한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 보통인 비문에서 광개토왕이 상대했던 적 중 가장 강력했던
후연과의 싸움 내용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
겠습니다. 비문을 만든 고구려인들에게 후연과의 싸움 내용이 광개토왕의 훈적을 자랑하는
데에 적절치 않은 주제라 판단이 되었거나, 다시 말하자면 광개토왕이 후연과의 전쟁에서
별로 득을 보지 못했거나, 아니면 득을 보았더라도 비문에까지 남겨 자랑할 수준에 이르지
못 하는 미약한 것이었다고 말입니다. 물론 단정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광개토왕과 후연과의 싸움 내용은 "삼국사기"의 것을 통해 살펴 보아야 하는데,
여기에서도 특별한 내용은 없습니다. 주로 후연이 공격해 들어오면 성을 방패 삼아
열심히 막아서 물리치는 식입니다. 재위 11년과 13년에는 공세적인 모습을 보여
후연의 본거지인 요서 지역까지 침투해 주요 성을 함락시키는 전과도 올리지만,
뒤이은 기사에서 전장이 요동 지역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함락시킨 요서 지역의 성을
계속 점유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바로 철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광개토왕이 후연과의 대결을 통해 획득한 성과라고 한다면 요동 지역을 완전히
고구려의 판도에 넣었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나마 양 웬리가 이젤론 요새 함락시키듯
절대적인 열세를 이겨내며 파천황적 업적을 세운 것이 아니고, 그의 아버지 고국양왕이
한 번 함락시켰다가(이때가 오히려 후연의 전성기였습니다) 도로 빼앗긴 것을 되찾아 와
굳히기를 한 것입니다.
게다가 딱 여기까지, 광개토왕은 더 이상의 어떠한 영토 욕심도 내지 않습니다.
암군(暗君)을 만나 나날이 쇠약해지고 급기야 정변이 일어나 스스로 망해 넘어가는
후연의 위기를 이용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중국 쪽 나라들이 성질이
안 좋아 우리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라는 식의 태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후연이 망하고 북연이 들어서자마자 바로 사절단을 보내서 친하게 지내자는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물론 새로 들어선 북연의 왕 모용운(고운)이 고구려계였다는 것도
그 이유였겠지요. 오래 전에 고구려를 침략한 모용씨가 잡아간 고구려 사람이
그쪽의 귀족이 되었고 그 집안이 공을 세워 '모용'이라는 왕성까지 하사받았는데,
결국 정변으로 왕까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고운은 얼마 안 가 다시 한족(漢族)인
풍씨에게 나라를 빼앗깁니다. 풍씨가 왕이 되었지만 북연은 국호를 바꾸지 않고,
고구려도 친밀한 외교 관계를 유지합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굳게 믿고 있는 '대륙을 호령한 광개토왕의 중원 정복 활동'의
전부입니다. 당시 갈갈이 찢겨져 있던 중국에서도 마이너에 속하는 작은 나라와 국경선을
가지고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 약간의 이득을 본 것이 다입니다.
'그래도 요동을 먹은 게 어디냐, 그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동은 중국 입장에서 보면 어디까지나 변경이고
눈에 별로 들어 오지도 않는 쪼가리 땅입니다. 심지어 대륙이 통일된 수당대에는 '요동은
멀고 생산물도 없는 척박한 땅이라 가지고 있어 봤자 관리하느라 재정만 낭비되고, 차라리
버리고 신경 안 쓰는 게 이득이다'라는 소리까지 듣는 불쌍한 동네입니다.
그러니 광개토왕이 요동을 점령했다는 '업적'을 내밀면서 중국을 향해 '대륙 정복'이니
'불세출의 정복 군주'니 떠드는 것은 야랑자대(夜郞自大)라고 비웃음을 받기 딱 좋은
행동입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광개토왕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 거의 그런 야랑자대 수준이라는 점이지요. 그러니 이쪽 분야에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저로서는 민망하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광개토왕의 업적은 역시 한반도 쪽에서 그 빛을 발합니다. 한때 군사적으로 고구려를
압박했고 그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의 목숨까지 잃게 했던 원수국 백제를 무력으로 완전히
압도했던 것입니다. 이는 당대 고구려인들에게 대(對) 후연전보다 훨씬 큰 인상을 남긴 업적
이었을 것입니다. "광개토왕릉비" 훈적조의 주제가 대 백제전이라는 것도 그 때문일 테구요.
비유하자면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즈를 완봉으로 짓밟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뿌듯함 정도
되려나요.
광개토왕 이전에 고구려와 백제는 황해도 즈음에서 대치하고 있었는데, 광개토왕의
군사적 성공으로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가 고구려의 판도에 들어오게 됩니다. 광개토왕의
정복 지역이 그 이하로 내려갔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광개토왕이 백제 수도인 한성을
압박해 백제왕의 항복을 받아내기는 했지만 한성을 아예 함락시키거나 하지는 않았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한성은 백제의 수도로 기능을 했으니까요.
학자에 따라서는 광개토왕의 정복지로 충청도 지역까지 포함시키기도 합니다만,
광개토왕 당대에 그러했다는 증거가 딱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강 이남에서 고구려군이
사용한 산성이나 병영의 흔적도 매우 드물게 발견되구요. 다만 단양의 온달산성이나
충주의 중원고구려비의 존재가 이들 지역에 고구려가 진출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데,
광개토왕 당대 보다는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게끔 만든 장수왕대
이후의 결과물로 보는 게 옳습니다.
이후 광개토왕은 신라의 지원 요청을 받아 5만의 병력을 보내 왜를 격파합니다.
이때 고구려군의 원정은 가야 지역까지 이어졌는데, 금관가야가 주도했던 전기 가야연맹의
붕괴 원인을 여기에서 찾곤 합니다. 최강자에게 붙어서 그보다 약한 인근의 다른 강적을
제거한다는 신라의 '삼국통일 전략'의 원형이 이때 이미 나타난 셈이지요. 이 원정을 계기로
신라도 고구려에 신하국을 자처하게 되어 고구려는 명실상부한 이쪽 동네 최강자가 되었고,
광개토왕은 신권 지폐에 들어갈 인물 도안을 놓고 역대 위인들과 자웅을 겨룰 정도로
후세에 길이길이 남을 전설이 되었습니다.
고대사를 전공한 학자들조차도 광개토왕 당대의 고구려가 '동북아 최강자'였다는
식의 말을 쉽게 입에 올리곤 합니다. 여기에서의 '동북아'가 요하의 동쪽 및 한반도를
가리키는 협의의 것이라면 과히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적잖은 사람들이
'동북아'를 중국 대륙까지 포함한 광의의 개념(현재의 동북아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또 의도적으로 그렇게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중국 쪽과의 싸움이라고는 이미
전성기를 지나 움츠러든 후연과 투닥거린 것 밖에 없는 광개토왕이 중국 대륙 전체를
압도하고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중국을 발 아래 굽어보았던 영웅인 것처럼 여겨지는
이상현상이 나타나곤 하는 것입니다.
광개토왕의 업적을 애써 폄하하거나 과소평가 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쪽
방면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고구려나 광개토왕에 대해 일반에 퍼져 있는 인식의 거품이
불편한 것이 사실이고(사실 정도의 차이이지 환단고기 믿는 사람들과 위대한 고구려에
가슴 뿌듯해 하는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고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거품이 문학이나 드라마 등 역사 외의 영역까지 퍼져 재가공되고 있는 상황이 썩 바람
직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판타지를 판타지로만 받아들이고 즐기면 그것으로 좋겠는데, "주몽"이나 "태왕사신기"
제작진들의 인터뷰를 보면 판타지를 만들어 내는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작업물을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엄숙하고 의기로운 '역사 바로잡기' 행위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 황당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빈약한 사고로 역사성과 실재성의 무게를 어설프게 흉내내는 판타지보다
캐릭터와 이야기 자체의 재미만으로 자부심을 느끼는 판타지의 존재를 바래 봅니다. 아울러
치밀한 고증으로 당대의 삶을 재현하는 진지한 고대 역사물이 등장한다면, 그것 또한 고마운
일일 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