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없는말 (2010-01-24 21:56:00, Hit : 134, Vote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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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인조시대는 어떻게 읽히는가? 추노 VS 최강칠우 
 

** 주의: 약간의 디씨어가 혼용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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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사극계의 아이콘이었던 정조의 시대는 가고, 인조시대가 왔다. 아, 인조시대가 한꺼번에 오지는 않았다. 일부만 제외하면 왔다가 간줄도 모르게 다녀간 <최강칠우>가 있고, 꽤 큰 흔적을 남겼던 <일지매>가 있었고, 그리고 지금은 <추노>가 와있다. 정조시대가 가버리고, 인조시대가 온 것은 무슨 의미일까? 조금만 머리를 굴려도 오만가지 착잡한 생각이 들지만 여기서는 다 생략하기로 하자. 중요한 것은 아무튼 최근의 사극들이 인조시대를 그리는 데에는 다 그만한 시사점이 있다는 것이다.

삼전도의 굴욕만이 굴욕적인 인조 시대의 최저점이었다면 차라리 그는 무능하고 비극적인 생을 산 조선 왕 중 하나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사후에 붙여진 시호의 어질 인(仁)자가 무색하게도, 인조라는 왕은 아들을 잔인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강력한 의혹을 받았을뿐 아니라, 자기 손으로 며느리, 손자들을 다 죽음으로 몰아넣은 극도로 파렴치하고 철면피한 왕이 되었다. (이점에서 아들 대신에 손자와 며느리를 택한 영조와는 또 차별점이 있다.) 두 번의 전란은 조선 사회를 밑바닥부터 뒤흔들었고, 패전의 책임이 자신에게로 오는 것을 두려워했던 두 임금은 왕과 협잡하여 자신들의 득세를 공고히 하려한 정치세력과 손잡고, 피의 정치로 왕좌를 유지하려 하였다. 전쟁 자체로 피폐화된 민중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였을지는 뻔히 짐작된다. 거기에 지배세력이 더더욱 수탈과 협잡의 정치를 가속화한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묻자. 정말로 우리는 그 민중의 삶을 뻔히 알고는 있는걸까? 교과서에 나오는 피폐한 민중의 삶이라던가, 신분사회의 해체 등등의 단어에 매몰된 그 처절한 민중의 삶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인조시대를 다루는 최근의 사극들이 이 처절한 민중의 삶에 시선을 돌리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하다.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민초들의 신산한 삶을 그린 사극들은 그 명맥을 조금씩 이어왔다. 하지만 사극이 드라마계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고 나서, 화면이 더욱 화려하고 찬란해지면 질수록, 드라마에서 "그 뻔한 민중의 삶"을 제대로 그려보려는 시도는 거의 중지된 거나 다름없었다. 정조시대를 그렸던 사극들이 마지막 개혁의 불꽃이 스러진 것을 아쉬워하는 시선으로 그리는 공통점이 있었으되, 이 시대는 그나마 조선이 마지막으로 역동적이고 긍정적인 변혁의 힘을 사회 발전의 동력으로 삼았던 시대였고, 그래서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그 시대에 목소리를 높였던 개혁 세력과 이들을 막고자 한 반동 세력의 대립각들을 주축으로 전개되었고, 따라서 정치적 힘을 거의 갖지 못한 피지배층의 목소리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인조 시대를 다루는 사극들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인조시대 사극의 주인공들이 의적이거나(일지매), 자객단이거나 (최강칠우), 혹은 전무후무한 추노패(추노)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기존 사극들의 주인공인 왕이나, 혹은 왕의 반대 세력일지라도 그들에게 "주인공"의 자리를 내주기에는 그들의 저지른/방기한 역사적 죄가 너무나 무겁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를 오직 저항자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의적으로 홀로 싸우든 (일지매), 자객으로 뭉쳐서 냉소를 떨쳐버리고 체제에 맞서건 (최강칠우), 어쩔 수 없이 그 세계에 휘말리게 되건 (추노)....이 시대는 싸워서 극복해야 할 시대로 우리에게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극이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장르라고 한다면, 지금 이 시대에 인조시대가 주로 묘사되는 것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최강칠우 - 난세에 태어난 개같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소제목의 '개같은 사람들'은 지배층을 말하는게 아니다. 난세에 사람으로 태어나느니, 태평성대의 개로 태어나는게 낫다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난세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지지리 고생을 한 민초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최강칠우의 자객단들은 기존 사극에서 묘사된 자객들처럼 높은 사람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로봇같은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극히 가난하거나 원통한 사람들에게서 개인적인 원한을 갚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마음'이 움직여야만 일을 맡았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냉소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던 칠우나, 임금마저 (아들과 며느리, 손자를 죽인)'강상죄'를 저지른 범죄자라는 사실에 분노한 민사관이 자객단의 일부가 되어서 맞서서 싸우다가, 결국은 최후의 공공의 적인, 소현세자 암살 사건의 주범들과 맞부딪히게 되는 이야기는 엉성한 만듦새때문에 놀림감이 되곤 했지만, 인조시대를 그린 그 어떤 사극보다 메세지에 있어서 직설적이고, 그 시대를 정면으로 응시한 작품이라 생각된다.

드라마 전체를 관통했던 사극과 어울리지 않는 서부극의 ost 를 닮은 주제가, 사극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을 받았던 서구적인 마스크의 주인공, 저렴한 제작비와 엉성한 만듦새가 기존 사극팬들의 냉소를 자아냈고, 메세지보다는 '화면발'이 흥해야 드라마가 흥하게 되는 작금의 시청패턴에 의해서 혹평과 무시를 받았지만, 사실 최강칠우에서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말했던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라를 지켜봐야 나라는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당장 나와 내 가족들부터 나라로부터 지켜줘야 하는게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끈질기게 살아남는게 민중의 몫이다"...라는 주제의식은 최근 몇년의 사극들 중에서도 손꼽힐만큼 탄탄한 내러티브와 진보한 역사의식으로 평가받을만 했다. 결국 드라마의 최후가 되면, 인조시대의 위정자들의 위선과 파렴치함은 극에 달했고, 참담한 조선 민초들의 삶을 비극적으로 몰아넣는 조선사회의 체계적인 위악스러움, 지리멸렬함에 대한 작가의 경멸 역시 극에 달하면서, 소현세자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왕손까지도 그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픽션'으로 이 시대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키고, 주인공들은 거대한 체제의 벽에 계란처럼 온몸을 맞부딪혀 싸우는 것으로 결말을 내리지만, 그 안타까운 저항이 드라마의 모토였던 "오직 사랑과 평화만이 가득한 세상"을 꿈꾸는 자들의 최선이었다는 것은 이 드라마가 방송되던 시기의 광우병 정국 속의 민중의 분노와 무자비한 폭력 진압등의 현실과 맞물려서, 꽤 큰 울림을 전하곤 했다.  


추노 - 어째서 노비가 아니라 추노가 주인공일까?

 

 

그렇다면 조선 역사상 가장 인기없는 임금, 패전의 책임자이자 굴욕의 대명사, 비속살인범인 인조의 시대를 그리면서, 그의 체제 하에서 가장 고통받았을 계층인 노비들을 극과 극으로 대비시키는 <추노>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사실 단순하게 가자면 가장 단순하게 그릴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 말이다. 인조 ㅅㅂㄻ, 노비해방 만세. 닥치고 추노 껒여 등등....

추노의 기획의도를 읽어보면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비였던 시대, 사람답게 사는 것이 온몸으로 투쟁을 해도 얻기 힘든 가치였던 시대의 노비들, 그리고 노비였던 사람, 노비로 전락한 사람, 노비를 쫓는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고자 애썼던 모습들을 '길바닥 사극'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그 시대를, 그리고 현재를 바라보고자 한다는 의미심장한 천명을 하고 있다.      

인구의 반 이상이 노비인 사회. 생산성의 관점에서도 비효율적이고, 윤리적인 관점에서는 비인간적이며, 시청자의 관점에서는 눈을 돌려 외면하고 싶게 만드는 사회구성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체제가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것은 당연히 수탈과 지배의 구조체제가 그만큼 공고하게 기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체제에 기생한 자들이 바로 "추노패"이다. 노비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갈빡을 뽀샤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증오의 대상인 이 추노패가 드라마의 주인공인 이유는 무얼까. 직업상 그들의 꿀복근을 보여주기가 가장 쉬워서일까?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헤매는 주인공의 순정때문일까? 양반에서 추노꾼으로 스스로 전락한 주인공이 배신한 노비에 대해서 자신의 애증을 투영하는 동안에, 이들을 통해 우리가 보게되는 것은 무엇일까? <추노>에서 드라마의 주인공을 노비가 아닌 추노패, 그리고 전직 양반, 가짜 양반으로 설정한 이유는 우리에게 설명될 것인가? 이제 6회를 지나서 극의 1/4을 통과한 이 드라마에 대해서 갖게 되는 의문점들이다.   

전설적인 미드 <뿌리>에서 주인공들은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흑인 쿤타킨테와 그의 자손들이었다. 그들의 시선에 비친 노예사냥꾼들이 어떻게 묘사되었을지는 뻔하다. 그런데 <추노>는 도망노비들을 잡는 추노꾼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양반이었다가 도망 노비가 된 태하와, 노비였다가 도망하여 신분세탁을 한 언년을 쫒는 구조로 전개된다. 그래서 드라마의 제목이 "노비"가 아니라 "추노"인 셈이다. 따라서 일부에서 이야기하듯이 어째서 노비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는가는 비판은 조금은 생뚱맞다. 노비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세상만이 그 시대 상황의 질곡을 전부 보여주는 최선의 방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보다는 조금은 더 복잡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 드라마가 어려운 위치에 놓인 것은 이때문이다. 전란을 겪은 조선사회의 신분체제의 해체와 동요는 드라마의 주인공들의 신분을 10년만에 다 바꿔놓으리만큼 격동의 시대였다. 그저 단순히 피수탈자의 시선에서만 이 시대를 그린다면, 그건 고대사나 중세사나 근세사나 그 문장이 그 문장인 북한 역사 교과서처럼 단순하게 요약되겠지만, 10년동안 더 이상 극적일 수 없으리만큼 복잡한 신분 변화를 한 세 주인공의 인생 역정은 추노패의 지도만큼이나 복잡하다. 그래서 드라마를 바라보는 시청자는 그만큼 몰입해야 하고, 또 그 때문에 '거리두기 효과'를 요구받는다. 당신은 드라마가 계속되는 내내 그렇게 쉽게 주인공들 중 누군가의 편이 되기 힘들 것이다. 멜로라인 지지자들, 메인이냐 서브냐 따지고 들기 좋아하는 드덕들 모두 당분간은 관망모드에 접어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추노>의 인간들은 쉽게 어느 한쪽만 편들어주기에는 인생이 다 기구하고 복잡하지 않은가 말이다. 
 

<추노>가 보여주는 현란하고 화려하고 세련된 카메라 워크와 연출은 처참한 시대를 그리면서도 스타일리쉬함을 유지해서 변화한 사극팬의 입맛과 눈높이를 고정시켜두고, 노비가 아니라 추노패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시선은 드라마의 전개 구조를 한층 복잡하게 만든다. 체제의 가장 바깥에서 정치와는 거리가 먼 저잣거리의 삶을 살아가는 드라마의 인물들이 어쩔 수 없이 정치세계와 연을 만들게 되면서 비극의 가속도가 더욱 거세질 이 드라마는 불과 1/4을 통과한 이 시점에서 벌써 30%의 경이로운 시청률을 달성했지만, 사실은 이제야 그 이야기 보따리를 열어놓은 셈이다. Hit the road, Jack 이라고나 할까.

오프닝의 다섯 주연들중 셋은 노비이거나, 노비였거나, 노비가 된 자들이다. 이들은 이합집산을 하게 될까. 그들은 공동의 적을 가지게 될까? 그리고 이들을 쫒는 나머지 둘은 체제 안에 있거나, 체제 바깥에 있거나 같은 좌상의 명을 받아 움직이게 된다. 그들은 '갑'의 명을 얼마나 충실하게 따를까, 혹은 따르지 않을까. 그들이 갖는 인간적인 갈등은 자신들이 쫒는 자들의 인간적인 갈등과 어떻게 부딪히고 파열하게 될까.

그리고 이들은 과연 소현세자의 유일한 혈손인 석견을 둘러싼 인물들의 이합집산 속에서 최종적으로 대립하게 될때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드라마의 후반부가 전반부에 보여준 로드 액션 무비의 양상을 벗어나 조금 더 어둡고 냉혹한 정치세계의 심연으로 들어서게 될때, 그들이 마주한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추노>가 맛보기로 보여준 정치인들의 묘사를 볼때, 곽정환 감독의 전작인 <한성별곡 正> 만큼이나 저 세계에 대한 묘사는 냉혹할 것이다. 그 냉혹함이 <최강칠우>에서 묘사된 방식과는 또 어떤 변별점을 가질 것인지 또한 개인적으로는 궁금하다.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2년의 시간이 지났다. 역사는 인조의 시대가 언제 끝을 맺는지 알려준다. 그러므로 태하가 지금 이 시점에 도망노비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앞으로 그가 만나게 될 새로운 인연들과의 씨줄 날줄이 어떤 속도로 교직될지 가늠케 한다. 앞으로 나오게 될 봉림대군은 어떻게 그려질 것인지, 그리고 소현세자의 유일한 혈육 석견을 통해 잃어버린 꿈을 다시 꾸고 싶어하는 태하의 속내는, 언년을 두고 멜로의 적이 될 것이고, 태하와는 목숨을 걸고 대립하게 될 대길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울림을 주게 될 것인가? 붓쥔 자들 믿지 말고, 정치의 냄새를 맡고 못마땅해하는 최장군 언니의 경고를 무시하고 달리고자 하는 대길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 이 추노의 길에서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 가장 비인간적인 시대에, 인간다움을 유지하고자 애썼던 사람들은...과연 그 노력의 결실을 맺게 될까. <추노>는 처절한 비극 속에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한성별곡이나, 살아남는게 이기는 길이다를 외쳤던 최강칠우 등 일련의 KBS 퓨전사극의 장르적 완성도와 메세지를 유지하면서도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성공사례가 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인조시대를 굳이 선택하고 또한 저잣거리와 노상에서 말달리는 사람들에게 카메라의 초점을 돌린 의도를 성공적으로 우리에게 전달하고 공감할 수 있게 만들까.

답을 얻으려면, 추노패들이 도망노비를 쫓아가는 와중에, 우리는 그들을 쫓아가볼 수 밖에...
갈길이 머니, 닭도 잡아 준비해놓고, 가는 길 심심하지 않게 해금도 찾아서 닦아보자. 작은 주모가 닭잡아줄리 없으니 아쉬운 대로 동네 치킨집 전번 찾아놓고, 해금이 없을테니 아쉬운 대로 OST 마련해두고 그저 닭치고 가보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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