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이 주어지는 조건으로서의 이른 ‘망각’ 은 선물을 주는 쪽에서만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선물을 받는 쪽에서도 근본적인 것이다. 특히 선물을 주는 주체에게 선물은 되갚아지거나

혹은 기억에 남겨지거나, 아니면 희생의 기호, 다시 말해 상징적인 것 일반으로 남아 있었서는

결코 안 된다. 상징은 즉시 우리를 또 다른 상환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사실 선물은 주는

쪽에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측면 모두에서 선물로 드러나지도, 선물로 의미되지도 않아야만 한다.
철학자 데리다. 주어진 시간 중
 
인문학적 표현에 익숙하지 않다면, 데리다의 논의는 조금 어렵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선물을 주기는 주지만, 선물을 주었다는 것을 망각해야만 한다는 그의 주장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 된다. 분명 다음과 같은 반문이 가능할 수도 있다. “선물을 준 다음에 내가 선물했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선물을 주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매우 날카로운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질문은 타당한 것일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데리다가

선물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강조하고 있는 논점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정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실 선물을 주고서 주었다는 사실을 깡그리

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데리다는 그런 식으로 불가능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을 잊으려는 우리의 의지만이 선물을 선물로서 만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대가를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지, 다시 말해 선물을 선물로서 주겠다는 의지는 사실 타자와의 사랑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회복하겠다는 의지와 동일한 것이다. 신혼의 어느 부부를 생각해보자. 남편은

아침에 아내가 차려주는 정성스런 식사를 ‘선물’로 받게 된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위해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식사를 차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신혼부부가 갖는 설레는

행복의 비밀이 있다. 반대로 월급날이 되면 남편이 가져다준 월급 봉투를 아내는 ‘선물’로 받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해준 식사의 대가로 남편이 월급을 건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댁은 남편의 월급 봉투를 받고서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서로에게 너무나 익숙해진 부부는 여전히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불행히도 대부분의 부부는

그렇게 하기 어려울 것이다.
월급날이 가까워지면 아내의 식단이 좀 나아지고, 동시에 월급날이 가까워지면 남편의 반찬 투정도

심해지기 쉽다. 월급을 받고 아내는 남편의 수고를 떠올리기보다는 오히려 그 돈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남편으로서 당연히 돈을 벌어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어쩌다 아내가 저녁에 늦게 들어와 저녁식사라도 차려주지 않으면, 남편은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 집에서 밥도 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늘어놓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식사를 차리는 것이

아내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선물의 관계가

뇌물의 관계로 변절되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사랑했던 두 남녀는 이미 하나의 교환 관계,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징적인 것 일반”에 매몰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강신주 교수 철학이 필요한 시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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